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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연애학개론

[연애학개론] 지금 그 사람에게 차여라

[연애학개론] 지금 그 사람에게 차여라



오늘 [연애학개론]은 듣기만 해도 우리를 움찔거리게 만드는 ‘차임과 거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차여왔나?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껏 얼마나 제대로 차여왔습니까.
과연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성에게 얼마나 '제대로' 차여왔을까요. 
내 연애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속상해하기 전에, 역시 연애는 '될놈될'이라며 한탄하기 전에, 저는 우리가 상대방의 면전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제대로 거절당하거나 차여본 경험이 실제로 얼마나 되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막상 그 숫자를 세어보면, 생각했던 것만큼 정말 그렇게 많나요? 아니면 혹시 우리들의 지난 연애의 아픈 기억들, 이른바 우리 연애의 흑역사들의 대부분이 차임의 역사가 아닌 '단념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진 않나요? 
오늘은 우리들의 '단념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사실 연애에 있어서 제대로 차이는 것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제대로 차이는 것의 전제는 우선 제대로, 그리고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인데, 이게 어디 쉽나요? 사실 연애경험이 적은 사람들일수록 차이는 것보다는 단념하는데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상대방이 알듯 모를듯 어중간하게 주위를 배회하며 눈치를 보다가, 나름대로는 마음을 표현한다고 생뚱맞게 잘해주기도 해보지만 시간이 흘러 점점 상대방의 반응이 시큰둥하거나 차갑게 느껴지면 지레 움찔 놀라며 어느새 자신감 그래프는 뚝뚝 하향 곡선을 그립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덧 상황은 지지부진해지고 이제는 말을 걸거나 문자를 보내는 것조차도 두렵고 겁이 나는 상황까지 오게 되고 결국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전달해보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죠. 이런 우리들의 서글픈 가슴 속에, 버나드쇼의 묘비명에 적힌 한마디가 송곳처럼 파고듭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단념 후에 남는 것들


혹자는 말합니다. '단념'이나 '차임'이나 어차피 그 사람과 못 사귀는 건 마찬가진데 뭐가 다르냐 라고 말이죠. 하지만 중요한 건 말이죠, 이 '단념의 역사'와 ‘차임의 역사’가 각각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는가 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금 당장 그 사람과 연인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우리의 길고 긴 연애 인생에서 크게 중요치 않습니다. 사람 인연이라는 것이 맘 먹은대로 어디 그렇게 쉽게 이어지나요?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이후에 무엇이 남느냐이겠죠. 

그렇다면 단념 후에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요? 자신감의 향상인가요? 연애 의지의 들끓음인가요?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과 자애감의 상승인가요? 다들 아시는 것처럼 당연히 전부 아닙니다. 자신감의 하락, 연애 의지의 꺾임, 자존감의 훼손 등등.. 오히려 그 반대의 감정들이죠. 결국 '단념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겨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경험치 0의 허무한 결과만을 가져다 주는 것이지요. 아, 물론 이런 사람은 주변 누군가에게 난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차인 적이 없다며 쓸데없는 자랑을 늘어놓을 순 있을지 모르나, 그 순간에도 그는 그냥, 외로운 솔로일 뿐입니다. 

하지만 '거절과 차임의 역사'는 다릅니다. 누군가로 부터 진지한 '거절 혹은 차임'을 경험한 사람들은 아픔과 열패감을 느낄 순 있으나 적어도 동시에 그 경험을 통해 최소 한가지 이상의 교훈을 얻게 됩니다. '아, 내가 그때 그 순간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혹은 '아, 내가 이래서 거절당했구나..' 등등 스스로의 지난 행동과 순간들을 돌아볼 수 있는 반추의 과정을 얻게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반추의 과정은 이렇게 계속 솔로로 지낼 수 없다는 오기와, 다음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발전합니다. 말 그대로 전투력의 상승이랄까요. 이른바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쓰러질듯 쓰러지지 않고 도리어 안광에서 살기(?)를 내뿜으며 끈질기게 일어서는 하이랜더처럼 말입니다. 이렇듯 '차임의 역사'는 생각보다 많은 깨달음과 경험치를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제대로 차이는 것도 축복이다


그래서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제대로 차이는 것도 축복이다’ 라고 말이죠. 지레 겁먹고 우물쭈물거리며 변죽만 울리는 상태에선, 제대로 차이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백미터 경주를 예로 들어봅니다.

말로든 행동으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상대방에게 관심과 호감이 있음을 표현하는 것. 그래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을 전달하는 것. 그렇게 상대방이 나의 호감을 알게 되는 순간은 경주로 치면 백미터 완주의 결승점이 아닌, 이제 막 첫 발을 내디딘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말 그대로 이제 시작인거죠. 

하지만 단념의 역사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순간에 너무나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즉, 혼자서 이런 고민 저런 고민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다가 더 이상 안되겠다 싶은 다급함이 찾아오는 마지막 순간에 어렵사리 상대방에게 호감을 전달했는데, 상대방의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내 연애가 그렇지뭐..’ ‘그래, 내 주제에 연애는 무슨..’ 이라며 금방 주눅이 들어버립니다. 마치 출발점에서 뛰어보지도 않고 스스로 스타트를 포기해버리는 격이지요.





우리는 우사인 볼트가 아니다


호감을 전달했다면 이제부터 서서히 가까워지도록 상대방에게 나를 알리고 상대방에 대해 더 알아가려는 노력을 해야죠. 왜 포기부터 하나요. 상대방의 시큰둥한 반응은 당연합니다. 설마 그녀가, 
“사실.. 저도 오빠한테 호감이 있었어요.^^” 
라는 만화 같은 반응을 보일거라 기대하셨나요? 

나의 관심 표현에 대한 상대방의 애매모호한 반응은 당연합니다. 평소에 특별히 지켜보지도 않았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는데 오히려 당황스럽고 불편하게 반응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지요. 오히려 그녀는 이제부터 나를 좀 더 주시하고 지켜볼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서야 조금 궁금해졌을 테니까요. 결국 이러한 과정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든 부정적인 결과를 낳든 그건 차후의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이제부터 결승점을 향해 열심히 달리는 것뿐이죠. 

물론 그 결승점에 이미 거절이라는 결과물이 기다리는 게 눈에 뻔히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달리고 봐야지요. 열심히 달리는 것만이 그 결과를 1%라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결과가 빤히 보인다고 해서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건, 스포츠맨십에도 어긋나는 일일 뿐더러 연애의 자격에서도 철저하게 실격입니다. 차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지금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가요? 

그리고 설령 차갑게 거절당하거나 실패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의 마지막 연애 상대는 아니니까요. 그러니 한두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말고, 또 다른 인연을 만나게 되면 다시 또 출발선에 서서 뜀박질할 준비를 하며 담담하게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신발끈을 조여매길 바랍니다. 지난번 경주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그때의 문제점을 고쳐나가며 이번엔 조금 더 나은 방식으로 경주를 펼쳐나가면 됩니다. 그뿐입니다. 한번에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우사인 볼트가 아니니까요.





우리가 그 사람에게 차여야 하는 이유


결국 우리가 그 사람에게 차여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하는 경험치의 획득에 있습니다. 피지알에서 이런 연애관련 글 아무리 독파해봤자 소용없습니다. 글을 읽을 때는 무릎을 탁치며 무언가 깨달은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막상 그녀 앞에만 가면 냉동인간이 되어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게 되는 걸요. 그러니 경험만큼 중요한 게 없습니다. 스스로 상처 받으면서 느끼고, 스스로 상처 받으면서 성장하는 게 연애 아닌가요. 결국 남은 관건은 상처와 열패감의 극복입니다. 거절과 차임으로 인한 상처와 열패감을 잘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만이 연애 성공의 지름길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도 말이 거창해서 열패감이지, 여러번 반복해서 경험하다보면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더불어 이러한 ‘차여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으로 용기있게 상대방을 대할 때에 오히려 상대방과의 관계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들이 그만큼 찾아온다고 봅니다. 제가 계속 이 글에서 “차여라, 차여라” 라고 얘기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결국은 그만큼의 용기와 배짱이, 지금 내 앞의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차임의 역사에서, 다시 성공의 역사로


단념의 역사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절과 차임의 역사는 성공의 역사로 가기위한 단단한 디딤돌이 될 수 있죠. 아무런 아픔 없이 어떻게 연애의 성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그 사람에게 차이십시오. 
아니 적어도, 차여도 괜찮다는 배짱과 용기로 상대방에게 다가서길 바랍니다.
이러한 담금질이 튼튼한 발판이 되어 종래에는 우리네 연애에도 간절히 기다리던 성공의 역사가 도래할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