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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연애학개론

[연애학개론] 날카로운 첫이벤트의 기억

[연애학개론] 날카로운 첫이벤트의 기억



오늘은 제 경험담 하나 풀어봅니다.


오래 전이죠. 2008년의 가을이었나요.. 제가 pgr 자유 게시판에 고백 예정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글 내용은 쉽게 말해 "내가 오늘 저녁에 이러 이러하게 만나온 그녀에게 이러 이러한 이벤트로 고백을 하겠다." 라는 내용이었죠. 그 당시 90%가 넘는 분들이 댓글로 저를 말렸습니다. "실패가 불보듯 뻔하다." "섶을 지고 불에 뛰어는 격이다."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린다." 등등의 현실적인 조언들이었죠. 저도 시작하기 전부터 눈물이 앞을 가리더군요. 어쨌든 저는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제 생애 첫 이벤트 고백을 실행에 옮깁니다. 뭐랄까.. 어차피 끝날 인연이라면, 차이더라도 좀 시원하게 차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한가닥의 기대감 또한 있었던 게 사실이죠.


그 당시 그 여자분과는 사귀지 않는 상태에서 한달이 좀 넘게 만났던 상태였습니다. 물론 애초에 제가 좋아해서 만나게 되었구요. 그런데 그렇게 데이트를 하며 어찌 어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남들이 봤을 땐 누가 봐도 사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우리 둘은 사귀지 않는 그런 어정쩡한 사이가 지속되더군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녀를 대하는 저의 태도였죠. 만남 초기에 그녀와 대화하던 도중 그녀가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저는 그 다음부터 그녀에 대한 마음을 숨기고 이른바 '나쁜 남자'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합니다. 말 그대로 겉으로는 차갑고 무심하게 행동하면서 은근히 챙겨주려고 노력했죠. 말 그대로 지난 글 [밀당의 기본]에서 언급한, 내게 관심도 없는 상대에게, 실패가 불보듯 뻔한 어설픈 밀당을 시도한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부터가 망조였습니다.


제 성격에 맞지 않는 나쁜남자 행세에 속으로 정말 마음 고생이 심했거든요. 역시 나쁜 남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군요.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는 일은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격의 저에겐 무척이나 곤욕이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어설프게 머리를 쓴 결과, 오히려 상황은 저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흘러가 그녀가 저에게 호기심을 가지기는 커녕 저의 진심을 의심하고 저를 믿지 못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더라구요. 결국, '이대로 가다가는 안 되겠다.' 라는 위기 의식에 조급해진 저는 그녀의 마음이 더 떠나기 전에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고자 나름의 이벤트를 준비하게 됩니다. 제 인생에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나름 커다란 이벤트였죠. 





날카로운 첫이벤트의 기억


우선 인터넷으로 티라이트 촛불 200개와 투명컵 200개를 주문하고 장미꽃 한 다발과 예쁜 목걸이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저녁에 그녀의 집 주변 초등학교에 가서는 수위 아저씨께 박카스 한 박스를 드리며 양해를 구한 후, 혼자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고생 고생하며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운동장 한 가운데에 촛불로 하트를 두겹을 그리고 그 양 옆에 그녀와 저의 이니셜을 촛불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촛불길을 만들고 하트 안에 장미꽃과 목걸이를 넣어두었죠. 그리고 그녀를 기다렸습니다.


제딴에는 정말 완벽한 준비였죠. 막상 이벤트 준비를 끝내놓고 보니 근본없는 자신감이 마구 샘솟더군요. 그녀가 이 광경을 보기만 한다면 내 고백에 안 넘어 올래야 안 넘어올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딱하고 안쓰러운 자신감이죠. 그렇게 촛불 붙이는 일만 남겨두고 그녀에게 잠시만 이쪽으로 오라고 둘러댄 뒤 그녀를 기다리며 촛불을 붙여 나갔습니다. 결국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요?


제 고백이 기적처럼 성공했을까요? 
아니면 시원하게 차였을까요?


아니요, 
둘 다 아닙니다. 


그렇게 촛불을 다 붙이고 나서 여유만만하게 그녀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가 오질 않는 거에요. 그러다가 한참 후에 전화가 왔죠. 지금 집에 가는 길이라구요. 운동장 입구까지 갔었다고 말이죠. 


네, 그런 거였습니다. 


그녀는 초등학교 운동장 입구에서 제가 촛불에 불을 붙이는 장면을 본 후 고민 끝에 발길을 돌려버린 것이죠. 저는 결국 그렇게 그녀의 마지막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직접 거절도 당해보지 못한 채 휴대폰 전화기로 쓸쓸하게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게 끝이었죠. 그 마지막 대화에서 그녀가 저에게 한 첫마디는 예전 글, [이런 여자 만나지마라1 - 솔직하지 못한 여자]라는 글에 있는 '두 남자의 이별 이야기'의 두번째 내용과 동일했습니다. 그리곤 끝이었죠. 결국 제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준비했던 '거대 이벤트'는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시원하게 차이고 싶었지만 시원하게 차이지도 못한, 말 그대로 참담한 실패였죠.


그렇게 전화를 끊고, 멍한 기분으로 담배를 한대 꺼내물어 조용히 태운 후,
야밤의 아무도 없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쪼그려 앉아 주섬주섬 촛불을 끄고 이제는 쓰레기로 변해버린 200여개의 촛불과 컵들을 비닐봉지에 주워담았습니다. 제 연애 인생 최초로 맛보는 깊은 열패감과 함께.


'내가 과연 앞으로 연애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내가 과연 누군가에게 또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라는 심한 상처와 열패감에 시달리며 pgr에 후기조차 올리지못한 채 제 고백 글을 지우고 잠적하게 됩니다. 내상이 너무 컸던거죠. 
바야흐로 2008년 가을의 일입니다.





고백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제가 오늘 굳이 이러한 제 개인적인 아픈 기억까지 끄집어 내며 '고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다른 게 아닙니다. 연애에서 정작 중요한 건 '고백과 이벤트'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거죠. 혹시 지금 현재, 누군가에게 고백 혹은 이벤트를 준비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잘 들어주세요. 연애에서 중요한 건 고백이 아닙니다. 이벤트는 더더욱 아니구요. '고백과 이벤트'보다 더 중요한 것, 그 이전에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은 바로 '교감과 진심', 그리고 '공감대와 신뢰' 입니다. 


만약 상대방과 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교감이 오고가고 나의 진심이 상대방에게 어느 정도 전해진 상태라면, 그래서 상대방이 나를 조금이라도 믿고 신뢰해주며 연애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이 되었다면 '고백'은 그저 지나치는 형식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황에선 그냥 공원 벤치에 앉아서 별다른 이벤트 없이 조용히 말을 건네더라도, 혹은 고깃집에서 마주 앉아 삼겹살에 소주를 먹다가 쑥쓰럽게 말을 꺼내더라도 얼마든지 긍정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될놈될'이라고 말하지만, 그 '될놈'들도 그냥 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반대로 상대방과의 별다른 교감도 없이, 나의 진심도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은 채.. 08년 가을의 저처럼 무작정 과감하게 고백하고 단지 커다란 이벤트 한방에 상대를 감동시키려고 하는 것은 정말이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방법입니다. 고백은 도박이 아니니까요. 물론 성공할 수도 있겠죠. 그런 과감성과 적극성에 상대방이 마음을 열 가능성도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봤을 땐 그 가능성도 높지 않을 뿐더러 실패했을 때 안게 되는 후폭풍과 후유증, 이른바 리스크가 너무나 큽니다. 제가 걱정하는 부분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고백하는 여러분이 안게 될, 감당하기 힘든 상처와 열패감 그리고 후회입니다.





상대방의 마음까지 배려하는 고백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구요? 네, 맞아요. 과거에는 분명 이 말이 통하던 시절이 있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1년인 현재, 지금은 통하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요즘은 열 번 찍어 넘어가는 나무는 커녕 백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가 훨씬 많아요. 그러니 아무런 생각없이 무작정 고백부터 하거나, 저의 경우처럼 상대방의 입장도 고려하지 않은 채 요란한 이벤트를 시도하기 보다는 우선 많은 대화로 그녀와 나 사이의 공감대를 넓히고 나란 사람의 따뜻한 모습과 진심을 더 많이 보여줘서 서로의 신뢰도를 단단하게 쌓는 데에 더 노력해 보세요.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분명 서로간의 거리를 확 좁힐 수 있는 기회와 타이밍이 옵니다. 


'교감'이라고 해서 추상적이고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기본적으로 상대방에게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되어주는 게 우선입니다. 그녀에게 나를 어필할 수 있는 데이트의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많지 않는 데이트 기회를 헛되이 버려선 안되겠죠. 과도하게 억지로 웃기려 들지 마세요. 상대방이 원하는 건 유머러스한 사람이지 우스운 사람이 아니니까요. 차라리 그 시간동안 서로의 생각이 비슷하고 통하는 구석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해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감의 첫걸음이죠. 그리고 무엇이든 한방으로 만회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조급하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거 아시죠? 머리를 쓰기보다는 진심과 한결같음으로 나에 대한 신뢰를 높여야 합니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되면, 손을 잡는다거나 하는 자연스런 스킨십 하나가 열마디 고백을 대신하게 됩니다. 굳이 고백이라는 요식적인 행위가 필요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과정 자체가 상대방의 마음과 입장까지 배려하는 고백이라고 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연애의 시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감과 진심 그리고 공감대와 신뢰' 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누군가에게 고백하기 이전에 그와 나 사이에 
'어느 정도나 교감이 되고 있나?', 
'그 사람이 나의 진심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나는 그녀와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나?'
'그녀가 나란 사람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보셨으면 합니다. 이 네 가지만 어느 정도 바탕이 된다면 그녀는 이미 당신의 연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리고 이렇게 현명하고 차분하게 연애를 준비하고 꾸려나가는 것이 이 글을 읽는 여러분과 제가 앞으로의 연애에서 아픔과 후회를 줄이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진심은 언젠가는 통하게 되어있다.' 라는 말은 거짓말인지도 모릅니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선 진심이 통하지 않는 순간이 더 많죠. 하지만 '상대방을 믿고 진심으로 대한다면, 설령 실패하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후회는 남지 않는다.' 라는 말만큼은 우리, 믿어보는 게 어떨까요.